<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답하는 법
※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전쟁 중 화재로 인해 어머니를 잃은 주인공, 마히토.
그 아픔을 간직한 채로 아버지와 함께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에서, 새어머니를 맞이하는 마히토.
시골에서 자꾸만 마히토를 괴롭히는 파란 왜가리.
그리고 그 곳에서 일곱 명의 할머니에게
탑에 대한 전설을 듣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새어머니가 사라지고
마히토는 전설의 탑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번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침표를 상징하는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왔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리뷰일지가 아닌 배움일지에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영화의 이름은 문장 그대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어렸을 적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라봤던 무서운 진실에 자신을 꾸밈없이 대입하며, 영화가 질문하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을 쓴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 곧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한 글자씩 써내려가는 과정은 실로 무거웠다.
어찌됐든, 운명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삶을 풀어내는 모든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않았다.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듯,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탑 안의 도피세계와 현실세계는 서로 연결되었고, 서로 작고 큰 영향을 교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탑의 신은 본인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지만, 그곳에서도 아픔은 존재했다 ㅡ 악은 세계의 뿌리를 섭취하며 성장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찌됐든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나름의 선택을 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 작은 탑 안으로 도피하는 사람, 거짓 속의 권위에 취해 세계를 멸망시킬 존재마저도. 각자의 문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존재였다. 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무력하게 말이다.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현실을 선택한 나'가 되는 과정을 가감없이 쏟아냈다. 이상적인 세계와 현실세계에서 긴 시간동안 갈등함에 대한 하나의 메세지였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늘 현실에 대한 긍정을 메세지로서 전달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달랐다. 현실은 그리움과 슬픔이 존재한다. 거짓과 모순 또한 우리와 함께 공존한다. 마히토처럼, 멸망의 감정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비합리적이고 불평등한 이 세계에서 어쩌면 과거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처럼,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세계로 도피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그런 고민을 해왔었다. 어찌 됐든,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또한 선택해야 했다. 필수불가결한 삶의 연속은 이 영화를 보기 한참 전부터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미 무력하게 미래를 선고해 버린 듯한 세상으로, 미하토의 엄마처럼 거리낌 없이 손을 뻗을 수 있을까. 이전의 불완전한 나를 이 세상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에서,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질문들에 대해 ㅡ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완벽히 마침표를 찍어줬다. '이것을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고 적힌 무덤을 건넌 마히토가 큰할아버지의 탑을 부수기까지, 이 영화는 내 눈엔 마히토가 무덤의 문을 넘어간 뒤 죽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고 생각했다.
신은 포기하고, 운명마저 선고해 버린 새로운 세상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