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똑같은 날은 내일이면 잠시 잊을 수 있게 된다.

 

음침하고 우울함의 사이에 조그맣게 끼워진 소소한 자유라는 건 유독 눈에 띄게 되기 마련이다.

짧은 휴가를 가겠다고 정해놓은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조금 전엔 이미 짐을 다 꾸려놓은 상태였고, 내 침대의 주변으로는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다.

 

매번 같은 하루의 반복에 염증을 느끼는 나는 이상하게도 좀체 일어서지 못했다.

삶에 치이며 허둥대던 옛의 기억처럼. 며칠동안 미뤄두었던 설거지가 갑작스레 생각이 나서, 두 발을 이끌어 아무렇게나 던져둔 옷들을 이리저리 치워 거실까지 작은 길을 만들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음식물이 묻어 더욱이 바랜 듯한 그릇들과 양은냄비의 사이로 서너마리의 파리들이 곡예비행을 선보이고 있었다.

나는 주방의 그런 풍경들이 너무나 익숙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어야 했다.

내 앞에 보란 듯이 놓여진 싱크대와 그것의 안에 놓여진 그릇들 앞에서 나는 갈등을 해야만 했다.

결국 나는 싱크대 앞에 서서 그릇을 억지로 집어들곤 수세미에 맞대어 비벼대기 시작했다.

내 정성으로 깨끗이 닦여진 그릇들은 이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 중엔 자리를 찾아가지 못한 그릇도 있었다. 이미 색이 바래서 내 손을 방황하게 만드는 그릇들도 있었고, 세제의 거품이 미끄러운 탓에 바닥이나 은빛의 싱크대 벽에 부닥쳐 깨져버린 그릇들도 몇몇 있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 손을 씻었는데도 퀴퀴한 악취가 가시질 않았다. 불안한 느낌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오늘은 그런 하루가 아니어야 되기 때문에.

 

설거지를 하고 나니, 그제서야 이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지가 수북한 책상과 그 안으로 넣어진 바퀴 달린 의자부터, 거미가 칸칸마다 작정하고 진을 쳐놓은 책장과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들.

이젠 그 본질을 잃어버린 작은 트로피들과 평소 좋아하던 캐릭터들을 본딴 미니어처 피규어까지.

이 곳은 나의 긴 공백을 선언함에 있어 반문을 품는 듯 나를 응시했다.

온전히 나의 공간이 될 수 없었다. 누릴 수 없었으니, 가지지 못했다.

지나온 날들이 깨부서진 그릇과 같은 형상으로 머리 속을 휙휙 지나갔지만, 이미 수천 번은 더 기억했던 일들이기에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비행기를 편도로 예약하고, 꽤 비싼 값의 펜션을 잡아두고, 긴 여행에 필요한 짐들을 꾸려놓기도 했다.

근데. 내 의식은 여기서 점점 썩어간다. 비틀린다. 죽어가고 있었다. 두려움이 일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그릇들을 거세게 벽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유리조각들이 책과, 트로피와, 피규어들과 책장의 칸막이에 부딪혀 스러졌다. 

작은 파편들이 내 몸을 스쳐 상처가 벌어져도 난 이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온 몸에 작고 커다란 생채기가 나고 찢어지길 반복하다가 이내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았지만, 통각만은 여전히 날 아프게 했다.

눈물을 흘렸다. 울고 또 울었다. 내가 던진 그릇들이 파편과 눌러붙은 먼지를 흩뿌리며 고요히 가라앉아, 일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불러올 때도 내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쓰레기같은 날들도, 하루하루가 피와 살이 되어 내 몸 위로 흐른다.

 

‘그래, 내일이면 잊을 수 있겠지.’ 나는 생각하며 화끈거리는 눈을 비볐다. 집안은 마치 좀도둑이 들쑤시고 다닌 듯 엉망진창이 됐다. 걸음을 옮기니 그릇에 베여 상처가 난 곳에서 진한 피가 뚝뚝 흘렀다. 마치 진흙을 걷어낸 진주처럼 청초한 빨강이었다.

 

‘가지지 못했지만, 누릴 수 있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것.’

 

나는 꾸려놓았던 짐들을 풀어헤치고, 비행기 편도 예약을 취소하고 펜션 주인에게 숙박을 하지 않겠다고 연락했다. 

 

나는 내일 휴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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