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떠나가자
떠나가자
2023.11.12왜, 떠나질 못하는지 시간의 흐름이 마치 바람과 같아서 미처 몰랐다. 무심하게 바람결만 느끼고 있기엔 여름은 잎을 잃어 추위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동안의 짐은 다 덜어내고 이젠, 떠나가자. 잊혀진 여름의 추억처럼 떠나는 건 어렵지만 이젠 떠나가자, 저 바람을 따라
별을 닮은 너는
별을 닮은 너는
2023.11.04“저 세상은 어떤 곳일까?” 작은 아이가 섬광처럼 빛나는 별을 가리켰다. 늘 같은 질문이었다. 저 세상은 어떤 곳인지. “저 곳은-“ 나는 운을 띄웠으나, 목이 순식간에 꽉 막혀 쉽사리 얘기가 나오질 않는다. 괜히 말해주기가 싫은 탓이었을까. 나는 옥색이 감도는 하늘과 그 뒤로 완벽히 검은 우주를 번갈아 보고는 홀로 손을 꽉 쥐었다. 손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게 느껴졌다. 다음 질문은 늘 하던 것들이겠지. 여기서 많이 멀 거냐는 둥,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냐는 둥, 늘 나누던 얘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성실히 답했다. “여기서 많이 멀어?” 나는 우두커니 별을 바라보았다. 아이와 나는 단 몇 걸음이면 이 별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별 위에 앉아있었다. 검은 배경 속 먼지처럼 ..
단 한 가지 위로
단 한 가지 위로
2023.11.02평등한 세상은 유토피아의 전유물이다. 가면 갈수록 견고해지고 첨예해지는, 우리를 향한 평가와 비판 말이다. 그것들은 평등이란 단어와 전혀 다른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침몰되어 빛조차 닿지 않는 심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죽을 힘으로 발버둥친다. 1등과 꼴등. 우등생과 열등생. 전교 학생회장과 평범한 학생. 비등기임원과 등기임원.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차이, 갈등, 대조, 대비, 비교, 비량, 사조의 세상에서 매일매일, 우리는 적절한 등급을 시험하고 판단한다. 우리는 늘 주관적인 삶에 객관적인 등급을 부여한다. 근데. 괜찮다고? 뭐가 괜찮은 건가? 잘 짜여진 판 위에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생쥐 꼴을 한 내가. 뭐가..
한 줌의 용기
한 줌의 용기
2023.10.29"잘못했다고, 찰나의 실수였다고. 좀더 노력해서 만회하겠다는 말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 같구나." 한 남자가 노란 빛의 백열전구만이 희미하게 드리우는 방에, 덩그러니 서있다. 백열전구는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남자의 주변과 횟빛의 벽만을 비추고 있다. 남자는 앞의 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찰나의 미동도 보이지 않은 채 입만 달싹였다. 남자는 고개를 내려 한숨을 쉬곤, 말을 이었다. "그놈들은, 아니. 어쩌면 우리 전체를 통틀어서 말하는 거다. 우리는 깊게 반성하고 뉘우치고, 그것을 바로잡았다고 생각할 테지. 모두는 자기 잘못을 스스로마저도 인정하지 못하는, 그런 수동적인 자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 거야." 남자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빈번하게 주변 환경 등을 이유로 수동적..
쉬는 법
쉬는 법
2023.10.231 새벽 4시. 길거리엔 킥보드가 또르르, 굴러나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막 학과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다. 벼락치기에 가까운 공부법(기행)을 선보이는 나는. 이럴 때마다 ‘편하게 쉬는 법’을 잊곤 한다. 학교를 조금 지나치면 이따금씩 축 처진 가방을 멘 학생 몇 명과, 눈에 불을 켠 채 아우토반을 달리는 차 몇 대가 보인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해서 킥보드의 속도를 늦출 때, 일사불란하게 발을 맞춰 무거운 봉투들을 큰 트럭에 던지며 수거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세상을 경쟁의 시점으로 바라본다면, 이 고통스러운 파노라마는 내 생각엔 옳았기 때문이다. 사이클을 더 열심히, 더 길게, 더 부지런히 돌렸다는 안도감과 뿌듯함..
마인드버그
마인드버그
2023.10.23“씨발. 좆같네.“ 그러고는 간간히 들리는 웃음소리. 아무렇지 않게 욕과 웃음을 같이 내뱉는 모습이 왠지 익숙했다. 오후 7시. 나는 에어팟을 귀에 꽂은 채 집에서 나왔다. 재즈 플레이리스트의 감미로운 멜로디가 바로 귀 옆에서 흘렀다. 그래선지 불협화음을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한 고깃집 앞에서 중년 두명 정도가 한탄하는 소리였다. 담배연기는 그 입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갔다. 연기는 조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가 금세 눈 앞에서 사라진다. 언젠간 우리 중에 섞여 행방조차 시작조차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잠시 온데간데 흩어져버린 연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나는 대학 정문에 도착했다. 주말의 밤이라 그런지 사람이 엄청 많았다. 사람의 감각은 실로 대단하다. 나는 도시 속의 협주곡에서도 그러한 불협화..
전자담배
전자담배
2023.10.21자정은 진작 지나친 듯한 깊은 밤이었다. 술집 거리의 경계선 즈음에 자리 잡은 한 라운지 바에서, 달큰하고 진득한 향이 바람을 타고 출입문 너머까지 퍼져나갔다. 꽤 잡스러웠던 소음들도 일렬로 길게 늘어진 테이블에서 출입문으로 사람들과 함께 사그라들고, 그림자를 한 꺼풀 벗어낸 로파이 재즈음악이 흘러나왔다. 가게의 벽면 통유리창 너머엔 홀로 선 가로등이 쉬지 않고 점멸하며 빛났다. 가늘게 들어오는 빛에 의존해 바 테이블의 끝자락에 앉은 수영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을 뒤로 젖히며, 절반 정도 채워진 술잔을 낮은 높이에서 천천히 두어 번 휘저었다. 그러자 다시금 올라오는 달큰한 향이 수영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상기인은 뛰어난 기량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오나 회사가 추구하는 인재상과는 거리가 멀어……’ 수..
휴가
휴가
2023.05.19매일 똑같은 날은 내일이면 잠시 잊을 수 있게 된다. 음침하고 우울함의 사이에 조그맣게 끼워진 소소한 자유라는 건 유독 눈에 띄게 되기 마련이다. 짧은 휴가를 가겠다고 정해놓은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조금 전엔 이미 짐을 다 꾸려놓은 상태였고, 내 침대의 주변으로는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다. 매번 같은 하루의 반복에 염증을 느끼는 나는 이상하게도 좀체 일어서지 못했다. 삶에 치이며 허둥대던 옛의 기억처럼. 며칠동안 미뤄두었던 설거지가 갑작스레 생각이 나서, 두 발을 이끌어 아무렇게나 던져둔 옷들을 이리저리 치워 거실까지 작은 길을 만들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설거지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음식물이 묻어 더욱이 바랜 듯한 그릇들과 양은냄비의 사이로 서너마리의 파리들이 곡예비행을 선..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2023.05.14어머니께서 별세하셨다고 들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점점 밀려드는 업무에 정신없는 나날을 헤쳐나갈 때, 경찰서에서 오는 전화를 받을 여념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겨우 업무를 끝내고 소파에 누워 담배 한 대를 꺼낼 즈음 두 번째 전화가 울렸다. 스피커 너머의 남자는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니는 외로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간단히 대답만 건네는 내 입에선 매연이 피어올랐다. 남자는 내가 해야 할 간단한 절차 등을 서술했고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내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집 밖을 거닐고 있었다. 근처의 가까운 벤치를 찾아 멍하니 앞을 쳐다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긴 시간을 홀로 보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또 그만큼의 침묵을 몰래 약속했었던..
의미
의미
2023.05.10의미. 요즘 나는 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처음 작곡하는 오케스트라. 복수전공. 여러가지로 나는 의미가 있다. 요즘 나는 꽤 잘 살고 있다고 생각, 했었다. 의미를 찾아가면서, 의미를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한 달 정도 일기를 쓰지 않게 됐다던지, 생각보다 낮게 나온 시험점수라던지, 항상 새롭게 약속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놓치게 되는 포스팅, 비슷한 맥락인 운동이라던지.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의미를 잃는다. 의미는 그 객체들이 갖게 되는 수동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비로소 바라보면 탄생하는, 마치 생명과도 같다. 뭐 그냥 그렇다고.
노을
노을
2023.05.10끝없이 퍼져나갈 것만 같은 노을이 다시 먼 거리를 돌고 돌아 내 앞에 마주보고 있다. 창문의 언저리에서 바라보고 있던 나, 그리고 그 뒤로는 점점 길어지는 노을만큼의 깊어지는 그림자를 뒤꽁무니에 단 채 창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 시간대가 되면 낡은 반지하의 방 안에도 아무렇지 않게, 붉게 달아오른 햇빛이 어김없이 방문한다. 항상 그럴 때마다 나는 그닥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해야만 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일 집 안을 드나드는 노을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매일매일 아름다웠다. 창문의 건너로 적당한 거리, 태양을 감싸고 있는 조그마한 구름들을 관찰했다. 그것은 속절없이 노을에게 난도질당한 자국의 사이로 붉은 피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인..